2024년, 에디티지는 신진 연구자 여러분이 연구 커리어 초기의 어려운 연구 환경을 효과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돕고자 ‘에디티지 장학금’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대망의 1등에는 ‘현장 진단 장치의 재정의’를 주제로 한 에세이를 제출하신 이도환 교수님이 선정되셨습니다.
이도환 교수님은 전자·전기공학을 연구해 오셨으며, 현재는 광운대학교 전기공학과 조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전자공학과 전기공학을 연구한 교수님께서 어떻게 하다가 종이 위에서 유체 흐름을 조종할 수 있는 ‘스마트 페이퍼’를 개발하게 되었는지, 이야기 나누어 봤습니다.
Q.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께선 종이를 기반으로 한 기술을 이용해 혁신적인 사용 사례들을 만들어 내셨는데요. 해당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저는 학사부터 박사까지 전자·전기공학을 전공했지만, 박사 과정 동안 수행한 연구 주제는 의외로 종이 기반 미세유체 기술(paper-based microfluidics)이었습니다.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전기공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정작 연구하는 분야는 얼핏 보면 전기·전자와 거리가 있어 보이죠. 그래서 같은 전공 연구자들도 제 이력을 보면 ‘어, 왜?’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학문적 호기심도 있었지만, 실은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어요.
박사 학위를 위해 처음 미국에 갔을 때는 미세유체소자(microfluidic device)를 제작하고, 그 위에서 바이오 분석을 수행하는 연구를 했습니다. 일견 이 연구도 전기공학과는 무관해 보이지만, 사실 반도체 공정 기술인 MEMS(Micro-Electro-Mechanical Systems) 공정을 활용하는 연구라 전기공학과 큰 연결고리가 있었죠. 그런데 2019년 말, 코로나19가 터지면서 모든 게 바뀌었습니다.
학교가 완전히 문을 닫았고 연구실 출입도 금지당해 클린룸 시설은커녕 연구 장비도 전혀 사용할 수 없었어요. 연구를 못 하면 졸업도 못 하고, 유학 생활이 그대로 멈출 위기였죠. 게다가 그때 한국-미국 장거리 연애 중이었는데 ‘내가 졸업을 못 하면 결혼도 멀어지나…?’라는 걱정까지 더해지면서 더 막막했습니다. (다행히 결혼은 성공했습니다!)
그때 집에서 혼자 앉아 고민했어요.
‘학교에 가지 않고도 연구할 방법이 없을까?’
‘특별한 장비 없이도 디바이스를 만들고 실험할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찾다 보니 종이 기반 미세유체 기술에 눈이 갔습니다. 이미 하버드대 화이트사이즈(George M. Whitesides) 교수님이 개척해서 연구가 활발한 분야였지만, 저는 기존 연구와 차별화된 방향을 고민했어요. 그래서 왁스 프린팅 대신 흔히 쓰는 유성펜(permanent marker pen)으로 종이 디바이스를 제작하는 방법을 시도했죠.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종이 위에서 유체가 흐르는 시간을 조절하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종이 위에서 유체가 흐를 타이밍을 프로그래밍 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든 거죠.
이 기술이 가능해지니까 다양한 바이오 분석법과 결합할 수 있었고 연구 범위도 확장되었어요. 논문도 하나둘씩 나오면서 자신감도 붙고, 이 분야가 가진 가능성이 점점 더 보이더라고요.
그렇게 어쩌다 보니 시작한 연구였지만 이제는 저만의 독창적인 연구 방향으로 자리 잡았고, 지금도 계속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해 나가고 있습니다.
Q. 스마트 종이 기반 사례(현장 검사, 랩온어칩, 미세유체학, 종이 기반 진단, 바이오센서 및 바이오 전자공학 등)를 활용하면 어떤 장점이 있을까요?
스마트 종이 기반 기술의 가장 큰 장점은 쉽고, 싸고, 빠르다는 점이에요. 기존 진단 장비들은 크고 비싼 데다가, 사용하려면 전문가가 필요하죠. 그런데 종이 기반 시스템은 구조가 단순하고 제작 비용이 낮아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어요. 덕분에 병원이나 실험실이 없는 곳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는 게 큰 강점이죠.
그리고 또 하나, 자동화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기존 종이 기반 디바이스들은 자발적 모세관 흐름(Spontaneous capillary flow)만 활용해서 유체의 흐름을 조절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ELISA 같은 다단계 분석을 하려면 사람이 직접 시약을 순서대로 넣어줘야 했죠. 하지만 제가 개발한 스마트 종이 기술은 유체의 흐름을 미리 프로그래밍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덕분에 여러 시약을 타이밍에 맞춰 순차적으로 흐르게 하여 올바른 반응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해졌죠. 실험실에서 인간의 개입이 필요했던 진단 기술을 이제는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이 기술은 특히 감염병 진단 영역에서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제가 연구했던 기술 중 하나가 코로나19와 인플루엔자 A/B 바이러스를 동시에 검사할 수 있는 종이 기반 분자 진단 키트였어요. 샘플만 넣으면 RNA 추출, 증폭, 검출이 자동으로 진행되도록 만들었죠. 실험실 장비 없이도 검사할 수 있고 사용법도 간단해서 팬데믹 같은 상황에서 빠르게 대응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결국, 저렴하면서도 간단하고 자동화가 가능하다는 점이 스마트 종이 기반 기술의 가장 큰 강점이에요. 앞으로 바이오 분석과 의료 진단뿐만 아니라 더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Q. 새로운 발견은 우연의 결과일 때도 있고, 사고의 틀에서 벗어난 결과일 때도 있죠. 연구실에서 벌어진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면 들려주세요.
앞서 설명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학교가 폐쇄되면서 실험실에 갈 수 없는 상황에 집에서도 연구할 방법을 찾다가 유성펜으로 종이 디바이스를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사실, 이 아이디어의 시작은 코로나가 터지기 약 6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저는 미세유체소자를 만들기 위해 클린룸에서 매일같이 하루 10시간 이상 방진복을 입고 작업했어요. 어느 날은 새벽까지 실험을 하고 겨우 몇 시간 잔 뒤 연구실에 다시 출근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기 싫더라고요. 하지만 주간 보고 마감일은 다가오고 있었죠.
너무 지쳐 그냥 연구실 책상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필통을 보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성펜을 왜 'permanent pen'이라고 부를까?’
‘방수성과 소수성(물이 잘 안 묻는 성질)이 있어서 그런 걸까?’
‘만약 그렇다면, 유성펜을 이용해서 종이에 유체가 흐를 수 있는 채널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호기심에 필통에서 유성펜을 하나 꺼내서 종이에 막 칠해 봤어요. 그런데 종이가 실제로 물에 젖지 않고, 표면도 소수성으로 변하더라고요. 직접 확인하니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채널 모양을 그려서 실험해 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종이 위에서 유체가 원하는 경로로 흘러가는 거예요.
그날 이후 연구실에 있던 모든 종류의 유성펜을 테스트해 봤어요. 그리고 흥미롭게도 유성펜이 물(wetting)에 반응하는 방식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는 사실을 확인했죠. 지면으로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유체 흐름을 유도하는 채널을 쉽게 만들 수 있는 특성을 지닌 펜이 있고, 유체 흐름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흐르게 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닌 펜이 있었습니다.
이 특징들을 연구하면서 종이 위에서 유체 흐름을 제어할 수 있는 스마트 페이퍼를 개발하게 되었고, 이를 LAMP, ELISA, LFA 같은 다양한 진단 기술에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죠.
이렇게 보면, 사실 연구라는 게 꼭 실험실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더라고요. 때론 피곤해서 멍때리다가도 엉뚱한 호기심 하나가 새로운 기술로 이어질 수도 있는 거죠.
Q.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하고자 하는 젊은 과학자들에게 조언 몇 마디 부탁드려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항상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너무 깊이 몰두하지 말고, 한 걸음 떨어져 보세요.”
물론 열심히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가지 문제에 너무 집착하면 오히려 생각이 좁아지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문제를 해결하려고 계속 고민하다 보면 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하게 되죠. 가끔은 그 고민에서 잠시 벗어나야 새로운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볼 기회가 생깁니다.
그래서 저는 의도적으로라도 연구에서 잠시 멀어지는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반신욕을 하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아내와 산책을 하거나, 맛집을 찾아다니거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기도 해요. 이런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자극(stimulus)과 영감을 받다 보면 어느 순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나 해결책의 실마리가 떠오르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실제로 제가 유성펜으로 종이 기반 미세유체 디바이스를 만들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도 연구실 책상에서 멍하니 필통을 바라보다가 우연히 시작된 일이었어요. 그날 계속 클린룸에 틀어박혀 똑같은 방식으로 연구만 하고 있었다면 절대 생각해 내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문제 해결이 너무 어려울 땐 그것에 너무 몰두하기보다는 가끔 한 걸음 떨어져 생각할 여유를 가지라고 (제 자신을 포함한) 젊은 과학자들에게 조언하고 싶어요.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연구실 밖에서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Q. 많은 논문을 내셨고 또 특허도 보유하고 계시죠. 기초 연구를 통해 혁신 기술을 개발하려면 주제에 대한 지식 외에 또 어떤 역량이 필요할까요?
저도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연구자로서 좋은 데이터를 얻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게 그 데이터를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하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대학원생 때는 이걸 크게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졸업 후 연구원이 되거나 교수가 되면 자신의 연구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깨닫게 돼요.
아무리 뛰어난 연구 결과가 있어도 논문으로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면 주목받기 어렵고, 학회나 강연에서 내 연구의 필요성과 임팩트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요. 결국, 연구 성과를 어떻게 글로 표현하고(논문) 말로 전달할 것인가(학회 발표, 강연)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저도 교수가 되고 나서야 이 부분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선배 교수님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죠. 그래서 지금도 능력을 키우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결국, 좋은 연구를 하는 것만큼 그 연구를 잘 전달하는 능력도 연구자의 중요한 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Q. 과학은 고도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분야죠. 서로 다른 기술과 지식을 보유한 개인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연구실 안팎에서 이루어진 협력들이 교수님의 연구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지금은 그야말로 융합 연구의 시대예요. 이제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단일 분야의 지식만 가지고 접근하는 건 비효율적이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하면서 서로 다른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생각을 교류하는 과정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걸 많이 경험했습니다.
특히 박사 과정을 했던 미국 연구실에서는 전기공학, 기계공학, 의공학, 화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함께 연구했어요. 덕분에 문제를 다각도에서 바라보면서 필요한 해결책을 즉각적으로 논의하고, 서로의 분야를 배우며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많았어요. 혼자서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이런 협업을 통해 나왔던 것 같아요.
하지만 효과적으로 협업하려면 서로를 배려하고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생각하지?’가 아니라 ‘아, 저 분야에서는 저런 시각으로 접근하는구나.’라고 받아들이는 편이 협업을 더 원활하게 만들더라고요.
결국 좋은 연구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각자의 강점을 살리도록 협업하면서 더욱 발전하는 것 같습니다.
이도환 교수님, 흥미로운 이야기와 경험에 기반한 조언 감사합니다. 혁신 기술 개발을 꿈꾸는 연구자 여러분, 댓글을 통해 궁금한 점이나 앞으로 다루었으면 하는 분야에 대해 알려주세요. 에디티지 인사이트가 찾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