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인 것이 확인이 되었다. 입덧이 시작되었다. 배가 점점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실험을 놓지 않고 있었다. 임신을 확인하고, 내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회식자리에서 “저 임신했습니다!”라고 지도박사님 이하 팀에 오픈하는 것이었다. 보통 임신 초기에는 유산이 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아기집이 생기고 태아가 자리잡기 전까지는 알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아기집이 보이기도 전 혈액검사만으로 임신을 확인한 뒤 바로 그 사실을 공개했다. 왜?
공개한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임산부이기 이전에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는 현장 과학자였기 때문이다. 현장 과학자, 말이 과학자이지, 현장에서 실험을 업으로 삼고 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나는 특히나 유기화학자였기 때문에 내가 실험실에서 고개를 돌리면, 예쁜 시약 병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간단한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 그림들은 대개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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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이 그려져 있거나, 불이 그려져 있거나, 혹은 흡입 독성이 있거나… 그리고 간혹 방사선이나 고자기장이 나오는 실험장비를 사용해야 할 수도 있다. 여러 모로 임산부나 혹은 태아에게 좋을 것이 없는 물질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 최대한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내가 마스크를 끼고 실험복을 입는다 한들, 내 옆의 동료가 유독물질을 흄후드 배기장치 밖에서 사용한다면, 나는 그 물질에 노출될 수 밖에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왜 임산부를 위한 실험복은 없는 걸까?
입덧을 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유기화학 실험실 특유의 냄새였다. 실험실이 아무리 배기와 환기를 신경 써도 늘 이상한 시약 냄새와 역한 실험 용액 냄새가 있어서 구역질이 심할 것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뱃속의 땡그리(아이 태명)가 실험을 해야 하는 엄마를 배려한 덕분인지 시약 냄새를 맡고 입덧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배가 나오면서 매우 불편한 사항이 한 가지 생겼다. 바로 실험복이었다. 유기화학자에게 실험복이란 많은 시약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자상과 화상으로부터 나의 몸을 지키는 최후의 방어선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나는 임산부, 내 안에는 생명 하나가 더 있으니 실험복 하나가 두 명의 생명을 지킨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맞는 실험복이 없었다.
* 막달에는 실험복도 못 입고, 이렇게 실험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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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나오면 나올수록 치수가 맞는 실험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한 치수 큰 실험복도 입어 봤다. 이 실험복으로 몇 달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 역시 6개월이 넘어서 배가 더 나오니 단추가 잠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 실험복도 구해서 입어 보았지만, 이건 기장이 땅에 끌렸다. 결국 실험복을 포기하고 앞치마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배가 나올수록 들뜨기 마련이어서, 막달에는 그냥 앞치마를 몸에 걸치고 돌아다니기를 선택했다.
왜 임산부 연구자를 위한 실험복은 없는 걸까? 임산부를 위한 군복도 있고, 승무원복도 있고, 은행원들의 임부복도 있는데 왜 과학자를 위한 임산부용 실험복은 없는 걸까? 임신 후, 랩에 나오는 연구자들이 잘 없어서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가 없어서일까? 가뜩이나 배가 나와서 실험 테이블에 배가 닿거나, 뭔가가 묻을 때가 많은데 그 배를 지켜 줄 보호복이 없다는 점이 너무나도 불편했다.
임산부 연구자를 위한 독성 정보는 어디에?
임부복과 함께 또 불편했던 부분은 안전교육이었다. 아직까지 한국의 실험실은 안전 문화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하다. 게다가 실험자에게 노출되는 독성물질에 대한 교육과 연구 역시 부족하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대한 교육이 가장 부족하다고 본다. 특히나 유전독성(genetic toxicity)에 대한 정보는 매우 부족하는 점을 이 시기에 알게 되었다.
물론 실험실 종사자들이 처한 환경은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실험실 안전교육 의식이 높아져서, 다들 실험복, 고글, 마스크, 글러브를 기본으로 착용하고 있다. 흄후드도 늘 작동하고 있어서 호흡 독성 위험도 낮다. 그러나 모든 독성 정보는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 성인 여성을 기준으로 하는 정보가 최근 많이 나오고 있으나, 여전히 대부분의 MSDS(물질안전보건자료)의 정보가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하는 만큼, 나는 임신 기간 동안 많이 불안했다.
그리고 임산부에게 끼치는 독성 정보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안전교육에 임산부 연구원에 대한 생식 독성 이야기는 특별히 언급되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 내가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임신 기간 동안 가능한 모든 검사를 했고, 아이가 태어난 후, 아이의 발달 과정을 세세히 살피려 노력했다. 그 덕분인지 아직 아이는 큰 문제 없이 크고 있다. 부당경량아여서 일 년에 두 번 성장검사를 하고 있지만, 에너지도 넘치고 입은 살아서 유치원 프로참견러로 쑥쑥 크고 있다.
내가 둘째를 좀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 첫 아이 때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각오를 했어야 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아이를 갖는 게 좀 무섭다. 하지만 이런 일을 만나는 사람에게 일일이 설명하는 것이 어렵기에 누구든지 둘째를 운운하는 것이 참 불편하다.
일일이 MSDS를 찾아서, 독성 정보를 확인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이냐고 묻는다면, 천만 원을 100원 짜리로 바꿔서 일일이 돈을 세야 하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런 불편함과 시간 낭비를 감수하고 일일이 정보를 찾아볼까? 나에게는 100원으로 천만 원을 세는 것과 실험실에 쌓인 시약의 MSDS를 일일이 찾으며 유전독성을 찾는 일이 동일하게 느껴졌다.
임신한 사실을 지도박사님께 알리고 나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사용하는 시약들과 실험 용액 등에 대한 독성 정보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흡입 시 문제가 되는 시약들은 없었고, 또 내가 있던 실험실은 장비가 매우 훌륭한 곳이라 독성물질을 흡입할 일 자체가 없었으나, 이에 대한 정보를 내가 일일이 찾아야 한다는 점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실험실 안전에 대한 체계가 잘 구축되어 추후 임신하는 내 후배들은 클릭 한 번에 임신 시 위험한 시약이나 용매들에 대한 정보를 한 번에 볼 수 있음 참 좋겠다 싶다.
임신, 출산 그리고… 엄마 과학자의 삶은 계속된다
그래도 내 몸에 해당되는 일에 대해 알아보고 대처하는 일은 그나마 쉬운 일에 속했다. 다음으로 내가 준비해야 하는 일은 휴가가 존재하지 않는 대학원생이 (출산휴가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출산휴가를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들 하겠지만) 혹시 육아휴직은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린이집을 알아보는 등의 빅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사실 특별한 태교를 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아이에게 해 준 태교를 굳이 꼽자면, 임신 기간 동안 진행한 랩 미팅과 랩에서의 논문 세미나 정도일 거다. 아마도 우리 땡그리는 뱃속에서부터 사이언스지와 네이처 케미스트리(Nature Chemistry), 오가닉 레터스(Organic Letters)의 페이퍼에서 전합성(total synthesis)이나 유기화학(organic chemistry)의 아름다운 메커니즘을 공부하면서 지낸 셈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임신 기간 동안의 랩 미팅 때문인지 아이는 영어도 좋아한다. 아마 아기 때, 주말에 출근하는 나를 따라 실험실을 오가며 잠깐이지만 외국인 연구자들이 아기를 봐 준 덕분인 듯도 하다. 사실 나는 태교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요즘 우리 아이가 하는 행동을 보면 꼭 무시할 것은 아닌 듯 하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아이는 자신의 실험실을 세팅하고 물티슈를 연구하겠다고 하는 등 이른바 사이언스키드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로 엄마의 강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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